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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산의 혜경궁 홍씨 그리고..한중록

죠이맨 2007. 11. 26. 20:59
 
 
 
혜경궁 홍씨 그리고..한중록(恨中錄)
 
혜경궁 홍씨(惠慶富 洪氏, 1735∼1815) : 조선시대 영조의 아들 장조(莊 祖,思悼世子)의 비(妃).
본관은 풍산. 영풍부원군홍봉한(洪鳳漢)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임. 9세 때인 1744년에 세자빈에
책봉되고, 1762년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자 혜빈(惠嬪)에 추서됨. 후에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랐고, 1899년, 남편이 장조(莊祖)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敬聽王后)로 추존.
1795년, 사도세자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많은 일생 을 (한중록)이라는 자서전적인 수필로 남겼음.
 
혜경궁 홍씨는 노론 부홍파의 수장 영의정으로서 사도세자의 장인으로서
사위를 지켜주지 않고 방관한 홍봉한의 딸입니다.
 혜경궁의 슬하의 자식으로는  2남 2녀가 있습니다.
- 의소세손
- 정조(조선 제 22대 왕)
- 청연공주 = 김기성(남편)
- 청선공주 = 정재화(남편)
 
적장자 정(의소세손)이 어린 나이에 죽자 둘째 아들 산이 왕세손이 되어 영조의 뒤를 이었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입니다.
정식 명칭은 경의왕후(敬懿王后)이고요.

그러나 그 분은 정식으로 왕비 생활을 하지는 못 했습니다.
남편인 비운의 주인공인 사도세자는 1735년 에 태어나 시아버지 영조의 노여움을 사 27세
의 나이로 뒤주에 갇혀 죽은 뒤 슬픔의 세월을 보냈지요.


뒤에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아들 정조가 장헌(莊獻)이란 이름을 올렸고
1899년 고종 때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됐다.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자 비로소 경의왕후라는 시호를 받은 것입니다.

혜경궁홍씨는 왕비로서보다는 궁중문학의 대표적인 작움인 <한중록>의 작가로 더 유명합니다.

한편 혜경궁 홍씨는 비극의 왕비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올랐지만 대비가 되지도 못했지요.
그 이유는 정조는 훗날 진종으로 불리는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으로 올랐기 때문입니다.

효장세자는 혜경궁 홍씨의 남편인 사도세자의 형님입니다.
즉, 아들을 아주버니한테 뺏긴 셈이라고 할까요.

이런 저런 비극적인 삶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정조를 훈육했으니
훌륭한 어머니였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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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의 저서 한중록을 보시면 혜경궁을 동정하게 됩니다.

미치광이 시아버지와 남편의 알력과 뒷바라지에 여념하고, 그 틈바구니에서 자식인 세손을 지키려고
바등거리는 모습등은 정말이지 눈물없이는 볼수 없게 그려 놓았습니다.
하지만, 이덕일선생 저서 사도세자의 고백을 읽어 보시면 혜경궁의 이중성에 치를 떨게 되실 겁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영조와 사도세자가 미치광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중록을 보면 영조는 사도세자를 끔찍이도 미워했다고 나오지만, 사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늦으막에
본 그것도 외아들이기까지 합니다.

왕이라는 직업의 특수성에 의해 대를 잇는 다는 것이 국가를 유지하는 것과 개념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영조는 외아들 사도세자를 미워할래야 미워할수가 없습니다.
(영조는 25세인 1719년에 정빈 이씨에게서 아들 효장세자를 보지만, 9년 만인 1728년에 잃게 됩니다.
그후 영빈 이씨로부터 사도세자가 태어난 건 1735년이니 실로 7년 만에 고대하던 왕자를 본 셈입니다)

그럼 금지옥엽 외아들을 지독히 미워했다고 왜곡한 한중록의 저술 배경은 무엇일까?
혜경궁은 왜 멀쩡한 시아버지와 남편을 미치광이로 몰아 붙여야 했을까요?
그것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그녀의 친정이 깊숙이 개입했기 때문입니다.

영조시절의 주도적 당파는 노론과 소론이었습니다. 영조를 보필하고 왕위로 밀어 올린 것은 바로 노론이었고, 소론은 선왕인 경종때의 집권세력으로 노론과 소론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인 당파였습니다.

탕평책 하면 영조를 떠올리는데 그런 영조 조차도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은인정당인 노론을 외면하지 못하고 감싸주곤 했습니다.

문제는 사도세자가 장성하여 정세를 파악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습니다.
경종시절에 왕을 멸시하길 즐겨했던 노론을 사도세자가 싫어했던 것이죠.

그들은 왕을 보필하는 집단이라기에는 너무 안하무인이었고, 사도세자가 보기에 신하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집단이었습니다.

노론과 사도세자의 대립이 극대화 되자 소론이 사도세자의 편에 서면서 이는 노론을 감싸주는 영조와, 소론의 힘을 받은 사도세자와의 권력 다툼으로 비화되고 말았습니다.

이 노론의 수장가문이 바로 혜경궁의 가문입니다.

사도세자의 죽음 당시 영의정 이었던 혜경궁의 아버지 홍봉한은 단연 노론의 거두이자 수장이었습니다.
노론을 적대시하는 사도세자는 사위이기 이전에 정적이었으니 그에게는 반듯이 제거해야 하는 대상인 셈이었습니다.


영조로서는 자신의 왕권을 침탈하는 사도세자가 못마땅했고, 세자를 따끔해 혼내주고 싶어했습니다.
이때 영조에게 뒤주를 소개한 것이 바로 홍봉한 입니다.
세자에게 사약을 내릴 수도 목을 벨수도 없었으니 뒤주에 가두어 두자는 의견을 영조에게 제시한 것입니다. 영조는 애초에 사도세자를 죽이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두었으니, 누구든 달려와 세자의 죄를 대신 빌고 구명을 청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세자를 위해 구명을 청한 사람은 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첫날 울며 매달리던 세손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왕이 한번 내린 명령을 청원도 없이 거둘수는 없는 일, 영조는 앉은 자리에서 제 손으로 자식을 죽인
애비가 되고 말았습니다.

원흉은 홍봉한이었고, 노론이었습니다.
그가운에 혜경궁이 있었죠.
혜경궁은 자신의 친정과 자신을 비호하는 노론을 보호하기 위해 한중록을 지었습니다.

사도세자 사후 세손은 영조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영조의 비호를 받게 되는데, 사도세자의 죽음에 중심에 있었던 홍봉한은 손자인 세손을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했던 반면, 홍봉한의 동생인 홍인한은 그면에서는 철저 했습니다.

영조가 세손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명하자, 홍인한이 나서 "세손은 그런것(정치와 당파)를 몰라도 됩니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고 합니다.

세손을 비호하고자 한 영조에 의해 친아버지 사도세자가 아니라 큰아버지 뻘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었던 정조가 등극하고 나서 한 첫마디가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것이었다니,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자신마저도 죽이려 혈안된 노론과 홍봉한 가문에게는 청천병력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들에 의해 무너진 친정을 복원하기 위해 혜경궁은 끊임없이 아들을 닥달하게 되고, 정조가 친정을 복원하기도 전에 사망하자 이번엔 손자인 순조에게 "네 아비가 내 친정을 복원해 주기로 하였다"는 증거물로 한중록을 창작해 낸것입니다.
 
혜경궁는 부군인 경모궁(사도세자)가 부왕인 영조대왕에 의하여죄인으로써 폐위되어 죽었으므로 후에 세자위로 복위선시되었다고는 하나 그 당시 조정과 궁(宮)내의 인식은 여전히 경모궁을 죄인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경모궁이 죄인이라는 인식때문에 왕통승계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했던 영조가 이미 십수년전에 유명을 달리한 효장세자(진종소황제)와 현빈궁 조씨(효순소황후)의 후사로 <선원록>에 정식으로 입적하게 만들어 차후에 왕통승계에 잡음이 일지 않도록 만들어 버리죠..
 
왕세손(정조)이 더이상 혜빈(혜경궁)의 아들이 아니니 왕세손이 등극을 하였어도 그녀는 대비가 될 수 없었으며(자격조차 안되죠.) 그저 경모궁의 빈궁(嬪宮)으로써 왕실가족들에 대한 예우차원에서 혜경궁의 당호(堂呼)를 받은겁니다.
(드라마 '궁' 에서 왕세손(이율)의 모후였던 서화영이 혜정궁이라는 당호를 받은 것과 유사한 경우입니다.)
 
그녀는 왕실의례가 있을때마다 대비의 신분이 아닌 빈궁의 신분이었으므로 며느리가 되는 중전 김씨
(효의선황후)에게 사배를 해야했으며 앉는 위치도 늘 아랫쪽이었습니다.
 
혜경궁이 살아생전에 대비의 칭호를 받지못한 것은 부군인 경모궁이 죄인의 신분으로 폐위되어 죽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이며 세손을 더이상 자신의 아들로 두지못했기 때문에 세손의 모후로써 인정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자격이 없었던 겁니다.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 1737~1815)가 쓴
자서전적 회고록-한중록(恨中錄)
 
그러할 제 날이 늦고 재촉하여 나가시니, 대조(大朝)께서 휘녕전(徽寧殿)에 좌(坐)하시고 칼을
안으시고 두드리오시며 그 처분(處分)을 하시게 되니, 차마차마 망극(罔極)하니 이 경상(景狀)을
차마 기록(記錄)하리오. 섧고 섧도다.
  나가시며 대조껴서 엄노(嚴怒)하오신 성음(聲音)이 들리오니, 휘녕전이 덕성합(德成閤)과 멀지 아니하니 담 밑에 사람을 보내어 보니, 벌써 용포(龍袍)를 벗고 엎디어 계시더라 하니, 대처분(大處分)이 오신 줄 알고 천지 망극(天地罔極)하여 흉장(胸腸)이 붕열(崩裂)하는지라. 게 있어 부질없어 세손(世孫) 계신 델 와서 서로 붙들고 어찌할 줄 모르더니, 신시 전후(申時前後) 즈음에 내관(內官)이 들어와 밖소주방(燒廚房) 쌀 담는 궤를 내라 한다 하니, 어쩐 말인고 황황(遑遑)하여 내지 못하고, 세손궁(世孫宮)이 망극한 거조(擧措) 있는 줄 알고 문정(門庭) 전(前)에 들어가,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 하니 대조께서 “나가라.” 엄히 하시니, 나와 왕자(王子) 재실(齋室)에 앉아 계시더니, 내 그 때 정경(情景)이야 천지 고금간(天地古今間)하고 일월(日月)이 회색(晦塞)하니, 내 어찌 일시나 세상에 머물 마음이 있으리오. 칼을 들어 명(命)을 그츠려 하니 방인(傍人)의 앗음을 인(因)하여 뜻같이 못하고, 다시 죽고자 하되 촌철(寸鐵)이 없으니 못 하고, 숭문당(崇文堂)으로 말미암아 휘녕전(徽寧殿) 나가는 건복문(建福門)이라 하는 문 밑으로 가니, 아무것도 뵈지 아니하고 다만 대조께서 칼 두드리시는 소리와 소조(小朝)께서,
  “아바님 아바님, 잘못하였으니 이제는 하라 하옵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하시는 소리가 들리니, 간장(肝腸)이 촌촌(寸寸)이 끊어지고 앞이 막히니 가슴을 두드려
한들 어찌하리오.
  당신 용력(勇力)과 장기(壯氣)로 궤에 들라 하신들 아무쪼록 아니 드시지, 어이 필경(畢境) 들어가시던고, 처음엔 뛰어나오려 하옵시다가 이기지 못하여 그 지경(地境)에 미치오시니 하늘이 어찌 이대도록
하신고. 만고(萬古)에 없는 설움뿐이며, 내 문 밑에서 호곡(號哭)하되 응(應)하심이 아니 계신지라.
  소조가 벌써 폐위(廢位)하여 계시니 그 처자(妻子)가 안연(晏然)히 대궐(大闕) 있기 황송(惶悚)하옵고, 세손을 밖에 그저 두어서는 어떠할꼬 차마 두렵고 소마소마하여 그문에 앉아 대조에 상서(上書)하여
  “처분이 이러하오시니 죄인(罪人)의 처자가 안연히 대궐 있기 황송(惶悚)하옵고, 세손을 오래 밖에
두옵기 가중(加重)한 몸이 두렵사오니 이제 본집으로 나가와지라.” 하고,
  “천은(天恩)으로 세손을 보존(保存)하여지라.”
써 가까스로 내관(內官)을 찾아들이라 하였더니, 오래지 않아 선형(先兄)이 들어오셔.
  “폐위 서인(廢位庶人)하여 계시니 대궐 있지 못할 것이니, 본집으로 나가라 하오시니 가마를 들여오니 나가시고, 세손은 남여(藍輿)를 들여오라 하였으니 나가시오리이다.”
하시니 서로 붙들어 망극 통곡(罔極痛哭)하고, 업히어 청휘문(淸輝門)으로서 저승전(儲承殿) 차비(差備)에 가마를 놓고, 윤 상궁이란 나인이 안 타고, 별감(別監)이 가마를 매고 허다(許多) 상하(上下) 나인이 다 뒤를 따라 쫓으며 통곡(慟哭)하니, 만고 천지간에 이런 경상이 어디 있으리오. 나는 가마에 들 제 막혀 인사를 도르더니,윤 상궁(尹尙宮)이 주물러 겨우 명(命)이 붙었으나 오죽하리오.
  집으로 나와 나는 건넌방에 누이고, 세손은 내 중부(仲父)와 선형(先兄)이 모셔 나오고, 세손 빈궁(嬪宮)은 그 집에서 가마를 가져와 청연(淸衍)과 한데 들려 나오니 그 경색(景色)망극함이 차마 어찌 살리오. 자처(自處)하려 하다가 못 하고 일이 하릴 없으니, 돌아 생각하니 십일 세 세손에게 첩첩(疊疊)한 지통(至痛)을 끼치지 못하고, 내 없으면 세손 성취(成就)함을 어찌하리오. 참고 참아 완명(頑命)을 보전(保全)하고 하늘만 부르짖으니, 만고(萬古)에 나 같은 완명이 어디 있으리오.

  세손을 집에 와 서로 만나니, 충년(?年)에 놀라고 망극한 경상을 보시고 그 서러운 마음이 어떠하리오. 놀라 병(病)날까 내 망극함을 서리담아,“망극망극(罔極罔極)하나 다 하늘이시니,
네가 몸을 평안(平安)히 하고 착하여야 나라가 태평(太平)하고 성은(聖恩)을 갚사올 것이니
설움 중이나 네 마음을 상(傷)해오지 말라.”하고, 선친(先親)께서는 궐내(闕內) 떠나지 못하시고,
선형(先兄)도 벼슬에 매이어 왕래(往來)하시니, 세손 모시옵고 있을 이가 중숙(仲叔) 두 외삼촌(外三寸)이니 주야(晝夜)로 모셔 보호(保護)하고, 내 계제(季弟)는 아시(兒時)부터 들어와 세손을 모시옵고
노던지라, 그 아이가 작은 사랑에 모시고 자고 있어 팔구 일(八九日)을 지내니, 김 판서(金判書) 시묵(時?)과 그 자제(子弟) 김기대(金基大)도 와 뵈옵는다 하여, 내 집이 좁고 세손궁(世孫宮) 상하 나인이
전수히 나왔는지라, 남장(南墻) 밖 교리(敎理) 이경옥(李敬玉)의 집을 빌려 김 판서 댁(金判書宅)이
그 며느리를 데리고 와 빈궁을 모시고 있게 하니 담을 트고 왕래(往來)하니라.
 
*저서 《한중록》은 사도세자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일생을 회고한 기록으로
궁중문학의 대표작입니다.
 
저자 이덕일
 
뒤주속 그 여드래동안 무슨일이 있었을까?
 
사도세자가 조선왕조의 비운의 왕자라는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가장 많이 드라마로 방영되었지만 어느 것 하나 색다를것 없는 한중록적인
역사관으로 접근한 작품들이었습니다.

   한중록은 사도세자의 정비인 혜경궁 홍씨가 직접 쓴 기록이니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사실 이기록의 맨 처음 제목은 '한가한 날의 기록'이었다 합니다.
혜경궁은 한중록을 쓸 당시 남편의 비참한 죽음에 오열하는 20대 청상과부가 아니었고 당시 혜경궁은
영조,정조,순조 세임금을 지켜본 70대의 노회한 정객이 되어있었습니다.
정조 즉위후 혜경궁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주범(병신처분)으로
몰려 어쩔수 없이 한중록을 저술하게 되었던 것이고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을 신원시켜달라는
정치적 의도로 순조때 저술되었습니다.실제 한중록에서 혜경궁 홍씨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영조가 자식들을 병적으로 편애하여 세자의 정신병을 심화시켰다는것이고
본인은 그와 다르게 선왕(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조실록에 따르면 사도세자와 모든 공주를 사랑한 자상한 아버지였다 합니다.
시집간 딸(화평옹주)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사가에서 밤을 세우고 화협옹주의 사후 옹주의 옛집에
들러 깊은 밤까지 명복을 비는등 영조는 남달리 인정이 많고 눈물이 많았다 합니다.
   하지만 영조는 치명적인 정치적 약점이 있었고(그는 노론이 추대한 왕이었다)그에 대한 컴플렉스로
탕평을 주장했지만 소론은 어쩔 수 없는 야당이었고 영조 그 자신은 노론의 왕이었습니다.
장인인 홍봉한과 혜경궁 홍씨 역시 정순왕후와 김한구와 결탁한 노론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정치적 소신은 소론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사도세자는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결국 뒤주속에서 죽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특히 장인인 홍봉한은 영조에게 뒤주를 대령한 인물이었고 세자가 죽던 날 한강에서
배를 띄우고 놀다가 세자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궁으로 들어왔다 합니다.

   사도세자는 정치적 소신이 분명했고(소론) 탁월한 능력의 성군이었다 합니다.
온천 행궁시 세자는 주민들을 위로하고 농사현황을 살펴보는등 백성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천여병의 수행원역시 한 사람도 앓는 자가 없는 살펴 탁월한 지휘능력을 선보여 온양 행차는
세자의 위의를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합니다.

   영조는 자신의 나이 40줄에 태어난 세자를 너무나 사랑했고 세자또한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합니다. 북벌을 꿈꾸며 정쟁을 일삼는 정치판을 개혁하려는 세자의 꿈은
너무나 확실한 정치적 견해로 노론의 역습을 받게 되지만 온양 행궁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성군의 자질을 가졌음을 틀림 없습니다. 
  
만약 사도세자가 영조의 미움을 받지않고 영조를 뒤이어 즉위를 했다면 조선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 기록되었을까?
아니, 정조가 노론의 방해 없이 그의 개혁의지를 제대로 펼 수 있었던 세상이었더라면
조선의 최후가 그리 비참하지만은 않았을 것을..
정조에 이어 즉위한 순조 때부터의 세도정치와 일제 강점기의 상황 모두가 조금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다.
 
출처 : 아름다운 추억여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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